2023.8 문화예술 아카이브 ‘과학적 상상력 위에 피어나는 예술’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월별 문화예술 아카이브’였다. 블로그 첫 글(https://raontt.tistory.com/2)에서도 남긴 바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참으로 쉽게 사라지고 변형된다. 게다가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적인 일과 관련된 감정, 느낌은 더 쉽게 잊히기 때문에 더욱 이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문화예술을 기록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을 것 같았고, 공연이나 전시처럼 감상할 수 있는 시즌이 정해져 있는 장르의 경우에는 주제를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에 가장 인상 깊었던 문화예술작품(도서, 영상물)을 선정해 ‘이달의 주제’로 이름을 붙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김춘수 작가님의 <꽃>처럼, 내가 만든 이름으로 글을 쓸 때 비로소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형태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해진 2023년 8월 문화예술 아카이브의 이름은 ‘과학적 상상력 위에 피어나는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은 많이들 별개의 학문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 둘은 매우 많은 연결고리가 있다. 상호 발전 관계라 할까나ㅎㅎ
예를 들어 19세기 발명, 발전되어 온 ‘카메라’는 오늘날 ‘사진’이라는 문화예술 장르의 기술적 근원이다.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회화는 전통적인 사실적 묘사를 사진에게 넘겨주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파도를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비교적 대중들에게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학문인 과학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대중들의 관심을 촉구시켜 새로운 돌풍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드라마 <싸인>을 통해 법의학에 대한 인식을 개선한 사례이다.
오늘 글에 남길 두 작품은 위처럼 과학과 예술이 만나 시너지를 터뜨린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도서_해저 2만리
사실상 ‘이번 아카이브는 꼭 남겨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된 이유였다. 도서관에서 ‘어, 생각해 보니 아직까지 쥘 베른 책을 제대로 안 읽어봤네?’하며 손이 가는 대로 뽑아든 책인데, 너무 흥미로워 단숨에 매료되었다. 재미있게도 그 이유는 ‘너무 현실감 있어서’였다. 시대적 배경과 ‘노틀러스 호’라는 미지의 무엇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행동(미지의 장소에 대한 강한 정복욕 등?ㅎㅎ)이 너무나 ‘19세기스러워서’, 그들이 당시로써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식에 근거한 추정과 행동이 오히려 진짜 ‘표류기스러움’을 부각시켰다.
‘바닷속’이라는 신비한 공간을 자신의 왕국처럼 누비는 네모 선장과 운명처럼 그 왕국에 발을 들인 아로낙스 박사와 일행들. 시대적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이야기와 유려한 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잠수함 모조 과정이나 여러 해양 생물의 특징 등)는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었고, 덕분에 나는 이들 사이에 몰래 찾아온 또 다른 손님이 된듯했다.
다만, 글을 읽을수록 미지의 바닷속 왕국(노틀러스 호)을 건설한 인물이자 큰 아픔과 비밀을 가진 듯한 네모 선장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는데, 이와 관련하여서는 본 작품이 아니라 외전 격인 <신비의 섬>에서 담고 있다 하여 이 감동이 끝나기 전에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_오펜하이머
이름이야 익숙하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이의 ‘전기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전날 우연히 보게 된 ‘알쓸별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지구별 잡학사전, tvN)’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뷰를 담은 편이었는데,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영화 관련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그의 신념과 애정이 느껴지는 듯해 문득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의 생애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수작(秀作)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똑똑함’이라는 무기에 근거한 오만에서부터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흔들림, 세상을 구하거나 완전히 파괴시킬 수 있는 무기인 ‘핵 폭탄’을 개발함에 있어서 느끼게 되는 상반된 감정까지.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잘 드러낸 이 영화는 나로 하여금 그가 처했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본인의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지만 그 결과에 걱정하기도, 후회하기도 하는... 아주 인간적인 사람의 모습 말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전기 영화’이기 때문에 과학에 포커스가 맞춰있지는 않지만,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그들이 하는 일과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들의 과학적 호기심부터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과 이 과정 속의 논쟁, 윤리적 책임까지도.
이와 더불어 감탄한 것은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감독의 능력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좋은 감독일지라도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온전히 잘 전달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더욱이 긴 러닝타임과 쉽지 않은 소재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아 능력이 되니까 시도하는 건가?ㅎ) 아무튼 오펜하이머는 그 이름처럼 놀란 감독이 선보이는 또 한편의 surprised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